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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프로 민원러의 나라 조선

https://youtu.be/eGFCjnNC-lw

이 영상은 조선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그 특징을 조명하며, 조선이 민본주의와 윤리적 국가로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영상은 조선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그 특징을 조명하며, 조선이 민본주의와 윤리적 국가로서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설명합니다.

또한, 경신 대기근과 같은 사건들이 조선의 몰락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며, 삼일운동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민주공화국으로 확립한 역사적 사건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조선의 민본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급진성 비교


조선은 민본주의를 기반으로 창립된 국가로, 1392년에 설립되었으며 국가 존재의 이유는 민본에 있습니다.

비교하자면, 소비에트 연방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이상 사회에 도달하려고 한 급진적 국가입니다.

조선의 민본주의는 백성을 위해 존재하지만, 사대부들은 엘리트주의를 가지고 백성을 통치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조선과 소비에트 연방은 모두 윤리적 국가지만, 그 실행하는 윤리는 다릅니다.

스탈린과 조선의 독특한 역사적 가치관


스탈린이 대숙청을 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윤리적 가치 판단이 있었고, 당시 양반가의 과부가 평생 수절하며 겪은 일들은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이었습니다.

윤리적 국가라는 개념은 자연발생적이지 않으며, 1392년에 발생한 사건은 매우 기이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조선은 매일 사극에서 접하지만, 사실 매우 독특한 국가라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왕조의 탄생과 사회 개혁의 필요성


정몽주와 정도전은 부잣집 아들들이지만,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개혁과 혁명을 감행했습니다.

이들은 토지 문서를 불태우며 조선왕조를 창립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아버지의 토지도 불타게 되었습니다.

조선 초창기에는 급진적인 성격을 띠었으나, 결국 조선 말기로 가며 극도의 보수성으로 낡은 국가가 되었습니다.

고려 사회는 라티푼디움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특권층이 소유한 대농장에서는 노비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조선 이름의 유래와 역사적 배경

조선이라는 나라가 시작되면서, 초기에 굴욕적인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나라 이름을 정하기 위해 명나라의 주원장에게 선택을 부탁하였고, 결국 '조선'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름 선택에는 화령과 조선 간의 협박의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어, 실질적으로 선택지는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이유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정치적 상황에 기반합니다.

고대 한국의 정통성과 조선인의 정체성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국으로, 이름부터가 동의어처럼 사용되었지만 조선의 세우면서 정통성 논쟁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의 조상과 연결되며 고려와 조선은 정통이라는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서양화된 요소들 속에서도 조선의 성리학적 이념은 여전히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한국인에서 서양화된 부분을 제외하면 조선인으로 볼 수 있으며, 조선에서 형성된 기질과 사고방식이 현재 한국인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조선의 민원과 그 복잡한 절차에 대한 설명


조선 때부터 우리 민족은 프로 민원의 기질이 있었으며, 민원은 백성들이 억울함이나 배고픔을 해결해 달라는 요청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조선의 민원 제도로는 신문고가 있지만, 실제 사용된 적은 매우 적고 절차가 복잡하여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이러한 복잡한 절차를 싫어해서, 대신에 격쟁을 통해 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고자 했습니다.

조선 왕조의 민원 처리와 그 영향


조선 초기, 사람들은 국가 성격 변화에 대한 인식을 했고, 민본주의의 구현을 요구했습니다.

왕들은 시각 장애인들에게 둘러싸여 격쟁을 당했으며, 이는 업무 처리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민원은 서류 행정과 기록에 따라서 엄청난 압박을 주었고, 특히 정조는 평생 동안 많은 민원을 처리했습니다.

정조 대왕은 3천 건 이상의 민원을 다루며 진정한 '다산콜센터'로 기능하였고, 이는 민원 처리의 중압감을 보여줍니다.

소송과 민원의 민족적 기질

우리나라는 민원이나 고소, 고발 건수가 인구 만명당 일본보다 150건 더 많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정말 '업소와 상소의 민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사람들은 작은 불편이나 억울함에 대해 참지 못하고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에 불만을 제기합니다.

이에 따라, 관은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억울함을 느끼면 반드시 신청해야 한다는 민족적 기질이 조선 시대에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생의 사회적 위치와 왕과의 관계


고급 기생들은 글을 잘 써서 임금님에게 '평생 월'이라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 상소문에서는 기생 선배와 자신이 알고 있는 못된 언니와 함께, 왕과의 관계를 디스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기생 선배가 미인으로 묘사되며 외모에 속지 말라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은 일반 백성의 읍소와 사대부의 상소에 응답하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한국 드라마의 읍소와 문화적 이해


한국 드라마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무릎 꿇고 간청하는 장면은 외국 K-드라마 팬들에게는 무섭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비춰집니다.

이런 행동은 실제로는 공포와 협박이 깔려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장소에서 이루어지곤 합니다.

또한, 조선은 '임금님의 국가'로서 국가에 대한 소유 개념이 있으며, 왕토 사상이 존재합니다.

조선의 건국 목적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는 당시 기준에서 최대한 잘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업 억제와 그로 인한 사회적 영향


상업이 억제된 이유는 곡물이 시장에서 유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곡물이 유통되면 가격이 오르고, 이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해 백성이 잘 먹지 못하게 됩니다.

에도 시대에는 상업이 발달했지만, 일반 백성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부자들이 곡물을 쌓아두고 고리대장사를 하면서 가격 상승을 촉진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상업의 발달과 억제는 상반된 영향을 미치는 일장일단의 상황을 만들어냈습니다.

경신 대기근과 조선 건국 이념의 상관관계


임진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람들은 경신 대기근이라는 진정한 재난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경신 대기근은 공포스럽고 초현실적인 재난으로, 이때 왕족과 정승, 판서들까지 굶어 죽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곡식을 저축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며, 저축을 하지 않은 이유는 백성들이 잘 먹고 살도록 시장의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경신 대기근 이전까지는 경제적 차원에서 사대부와 왕실이 조선 건국 이념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외모에서의 국제적 인식


경신 대기근 이후, 사람들은 생계를 고민하며 재물을 축적하게 되었고, 양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기근 전까지 조선인들은 잘 먹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며, 잘 먹으면서도 국제적으로 미남으로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한국 작가로서 서양인의 조선인 외모에 대한 긍정적인 증언을 기록하는 것은 남다른 어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서양인 방문객들은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의 외모를 비교하며 조선인이 평균적으로 더 키가 크고 치아가 좋다고 언급했습니다.

한국과 아시아의 유전자 분석에 대한 논의


최근 유전자 분석 결과에 따르면, 한국, 중국, 일본의 유전자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아시아 3국의 사람들은 서로 유전자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한국이 과거 500년 간의 영양 상태가 좋았다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또한, 사모아인과 마오리 족 등 다양한 해양 민족들도 유전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대만 원주민과 같은 특징을 가졌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특히 대식가로 알려져 있으며, 서양인들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인들의 증언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외모에 대한 서양인의 평가가 혼혈을 추측하는 경우가 많아 불쾌감을 주기도 합니다.

조선의 몰락 이유: 경제적 모순과 착취


조선의 몰락은 첫 번째로 경신 대기근이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모순이 강화되면서 점차 양극화가 시작되었고, 이후 가뭄이 들 때마다 농민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농민들은 매번 가뭄으로 인해 고을에서 빌린 곡식을 갚지 못하고 땅을 팔게 되며, 이를 통해 소작농으로 떨어진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농민들이 세금과 이러한 고리를 해결하려면 결국 50%를 바쳐야 하며, 이로 인해 경제적 체력이 약해져 저축할 수 있는 곡식의 양이 줄어듭니다.

결국 이자벨라 여사는 '조선에는 착취당하는 자와 착취하는 자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는 말로 조선의 경제적 모순을 드러냈고, 이는 나라의 몰락을 예고했습니다.

탕평책과 정조의 행정력 비교


영조가 탕평책을 추진하여 붕당정치를 없애면서, 왕권 집중을 통해 정조는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정조는 6년 동안 식목 사업을 진행하여 1200만 그루를 심었고, 그 시기 조선의 행정력은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정조의 죽음 이후 세도 정치로 인해 자원 고갈과 양극화가 발생하며, 고종 때에는 다시 '강산 푸르게 푸르게' 사업을 진행하였으나 겨우 5만 그루를 심었습니다.

조선과 한국인의 탄생, 역사적 맥락


조선 왕조의 체제 실패 여부는 단순히 역사적 결과로 판단할 수 없으며, 특정 시기의 관점에서 이를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했다고 해서 그 나라를 단순히 패배한 나라로 간주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모습으로 조선 전체를 설명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조선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1919년 3월 1일이 한국인의 탄생일이라고 보시며, 이는 한국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입니다.

삼일운동은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의 근본 사건


삼일절은 단순한 만세 운동이 아닌,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민주공화국으로 정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삼일운동 이후, 4월에는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성공적인 운동으로 믿고 언젠가 독립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삼일운동은 드라마틱한 발전을 가져오며, 우리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헌법의 가치가 민주공화국을 기반으로 하며, 우리는 이 헌법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민주화 투쟁을 했습니다.

삼일운동 이후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북한이 아닌 우리에게 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1919년을 건국의 해로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