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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중국역사│지금의 중국을 만든 중국 희대의 참극과 홍위병│대약진운동 4500만명 아사, 문화대혁명 170만명 사망

https://youtu.be/eF7P7cnfW-M


마오쩌둥의 토지 개혁과 대약진 운동

1949년,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그는 농촌의 토지 개혁을 통해 지주들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그러나, 이 초기의 성공적인 정책 이후, 1958년 인민공사 체제를 도입해 토지 사유화를 폐지하고 집단화를 실시했다.

이로 인해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중국을 급속히 선진화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된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기근과 대규모 사망을 초래했다. 서방 자료에 따르면, 대약진 운동으로 400만에서 최대 46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오 쩌둥과 리우 샤오치의 정책 대립


당내 원로이자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펑더화이는 대약진의 실패를 비판하며, 마오 쩌둥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약진 기간 동안의 성과가 허위이며 인민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오 쩌둥은 이 편지를 회의에서 공개하며 펑더화이를 우익 기회 분자로 몰아가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루산 회의 후 펑더화이는 해임되어 권력에서 밀려났고, 문화대혁명 동안 홍위병의 핍박을 받아 1974년에 감금된 채로 생을 마쳤다.

1959년 4월, 마오 쩌둥은 대약진 운동 실패 책임으로 국가 주석직을 사임하고 리우 샤오치를 후계자로 세웠다.

리우는 대약진으로 파탄 난 농촌 경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현실적인 경제 정책을 펼쳤고, 개인 토지 소유와 가축 사육, 잉여 곡물 판매를 허용하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게 되었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과 정치적 대립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상관없이 중국 인민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해석된다.

1962년 1월, 북경에서 7천명의 당 지도자들이 모인 천인 대회에서 우치는 성공의 30%는 천재, 70%는 인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번더와이를 우익 기회주의자로 비판하며 마오 쩌둥에 대한 직접적인 반감을 표출했다.

마오 쩌둥은 리우 샤오치와 덩샤오핑의 경제 건설 방향이 자본주의 부활이라고 판단하고,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이들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로 인해 마오와 리우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으며, 이는 대약진 운동 실패에 따른 권력 투쟁과 노선 대립으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의 시작과 마오쩌둥의 전략


1965년 10월, 리우 샤오치와 마오 쩌둥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야원위는 '문회 보'에 '신편 역사글 해섭 학원을 평가한다'는 글을 게재하며 해섭 학관의 음모를 주장했다.

그는 해섭 학관이 자본주의 부활을 꾀하는 우파의 숨은 음모라고 비판하며, 마오 쩌둥의 지지를 받던 리우 샤오치를 공격하였다.

야원위의 글 이후 신문과 잡지들은 해석 파를 비판하며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자재를 찾아내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1966년 5월 16일, 문화대혁명의 전면전을 알리는 516 통지문이 발표되었고, 이는 반사회주의 부르주아 계급을 비판하고 당내 실권파와의 투쟁을 명시했다.

이후 마오쩌둥의 부인 짱이 정적을 제거하려는 큰 그림을 그리며, 마오가 군중을 이용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홍위병들, 마오 주석 지지를 기반으로 활동 시작


북경대 대자보 사건을 계기로 불길이 전국적으로 급속히 퍼지면서 학생들은 비판 대회를 열고 각급 당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홍위병으로, 1966년 8월 8일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 관련 결정을 통과시킨 후, 다음 날 인민일보에서 이를 헤드라인 뉴스로 알렸다.

홍위병들은 홍군을 모방하여 황색 군복에 홍색 완장을 차고 홍위병 전가를 부르며 등장하였다.

1966년 8월 18일, 전국에서 모인 100만 명의 홍위병들이 마오 쩌둥을 만나기 위해 열광하며 만세를 외쳤고, 이들은 마오의 어록을 신성한 명령으로 여기고 일사천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오의 지시에 따라, 홍위병들은 구시대와 부르주아를 타도한다는 명분 하에 무자비한 파괴를 진행했다.

문화대혁명의 혼란과 마오쩌둥의 사망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자살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혁명이라는 명분 아래 폭력이 정당화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최대 공격 대상은 마오쩌둥의 정적 리우 샤오치였으며, 그는 여러 차례 홍위병에 의해 고초를 당하게 됩니다.

리우 샤오치는 1969년 12월 사망하고 덩샤오핑은 지방 공장으로 쫓겨납니다.

그 후 혼란은 내란의 양상으로 전개되며 홍위병 간의 무력 충돌이 빈번해졌습니다.


1969년 4월, 공산당 전국 대회에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린 비우가 지명되지만, 그는 리우 샤오치의 음모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라집니다.

결국 그의 죽음은 문화대혁명의 파국을 알리게 되었고, 경제가 악화되자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다시 등용하게 됩니다.

문화대혁명과 마오의 유산에 대한 회고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약 4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문화대혁명으로 약 170만 명이 사망했다.

이에 따라 1억 명의 중국인이 피해를 입었지만, 많은 중국인들은 마오를 그리워하며 천안문 광장에 그의 사진을 걸어놓고 있다.

올해 7월, 북경 소재 명문대 학생들이 마오의 동상 앞에서 추모 행사를 열었다.

마오는 1966년 홍위병과 함께 무장 투쟁을 이끌었으며, 문화대혁명은 그 참극을 세계에 알렸다.

현재도 마오의 사진은 천안문 광장에 걸려 있으며, 100위안 지폐에 각인되어 중국인들의 삶 속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마오쩌둥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한 것을 보여주며, 인간의 결정에 대한 중요한 경각심을 일깨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