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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소크라테스, 삶으로 철학을 쓰다

https://youtu.be/aZC8XqUAf2Y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사람들의 편견과 부실한 언어관으로 인해 사회적 타락이 일어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개념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을 사용하여 상대방의 주장에서 모순을 찾아내고 정의된 개념을 명료하게 정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덕을 쌓고자 했으며, 그에게 덕은 훌륭하고 좋은 상태를 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성을 사용해 개념들을 정의하고 탐구함으로써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경건, 절제, 용기, 정의 등 다양한 개념에 대해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편견을 깨고 진리에 접근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개인의 육체적 쾌락이나 사회적 지위보다는 영혼의 발전과 돌봄을 우선시했습니다.

영혼을 돌보며 지혜를 쌓는 것이 삶의 가치라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무지함을 깨우치고 지식을 탐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초기 삶과 외모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 경 아테네에서 태어났으며, 외모는 거친 피부, 툭 튀어나온 눈, 두꺼운 입술 등으로 아테네 사회에서 통상적인 미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외모를 희화화하며 쿨하게 반응했으며 이는 그의 높은 자존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자랑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세 번의 큰 전투에 참여했으며 특히 포티다이아 전투에서 알키비아데스의 생명을 구하고 훈장을 받는 등 전쟁에서 용기를 보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미친 집요함을 자랑했으며, 밤새 술을 마셔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하며,그의 아내 크산티페는 역사적으로 악처로 알려졌으나,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가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석공사로 경제적 자유를 누렸을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친구들, 소크라테스의 지혜탐구


소크라테스는 아폴론 신전에서 아테네에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고 카이에포이 델포이 신전으로 가서 신탁을 하였는데, 각 지혜로운 사람을 찾으러 다니면서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들은 있었지만, 모두 자신에게서 부족한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라고 불리며,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지혜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테네 시대는 민주주의가 번영하며 웅변과 변론술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고, 소크라테스는 언어와 개념을 정의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소피스트들의 주장과 다르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이성론과 지식의 한계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의 상대주의적 언어관이 도덕적 타락을 가져왔다고 보고, 이성을 통해 객관적 본질을 드러내고 개념을 정의하는 일을 중요시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에 기인한 모호한 언어 사용과 편견이 소통의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고, 제대로 된 앎은 실천과 노력 없이 그 앎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으며,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개념을 찾아 실천적 지식을 추구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덕과 덕에 대한 앎을 탐구하며 인간의 훌륭한 상태를 추구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탐구의 핵심으로 덕, 즉 '아레테'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아레테'는 그리스어로 사물이나 사람의 훌륭한 상태를 의미하는데, 단순히 '덕'이라는 번역으로는 그 의미를 완전히 담아내기 어렵습니다.

 

아레테는 각 사물의 본질적인 기능을 최적화하여 최고의 상태를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안경의 아레테는 눈을 잘 보이게 하는 기능, 가위의 아레테는 무언가를 잘 자를 수 있게 하는 기능입니다. 사람의 경우, 교사, 군인, 장인 등 각자의 역할에서 최선을 다하는 능력이나 자질이 바로 그 사람의 아레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아레테가 무엇인지, 즉 어떻게 하면 사람이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탐구했습니다. 그는 덕을 쌓는 일이 재산, 지위, 명예보다 중요하며, 심지어 죽음보다도 더 중요한 인간의 본질이라고 보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앎과 덕은 하나다"라는 전제 아래, 인간의 훌륭한 상태를 실천하기 위해 덕에 대한 지식을 끊임없이 탐구했습니다. 용기, 경건, 절제, 아름다움, 정의 등의 개념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토론하며 명확히 하려 했습니다. 그는 편견을 깨고 무지한 자들이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며, 이들이 이성을 사용해 대화와 토론을 할 때 개념이 명료해진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탐구를 통해 앎이 명확해질수록 인간은 더욱 훌륭한 삶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장(아고라)을 누비며 주야로 토론을 벌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탐구 방식은 주로 '문답법'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두 가지 주요 기능인 '논박술'과 '산파술'을 포함합니다. 

 

논박술은 상대방의 주장에서 모순을 이끌어내어 반박하는 방법으로,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에게 정의, 경건, 우정, 용기 등의 개념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라고 요청했습니다. 상대방이 내놓은 정의에서 모순을 발견하면, 그 모순을 지적하고 새로운 정의를 내리도록 요구했습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여 개념의 모순을 줄이고 명확하게 만드는 것이 논박술의 핵심입니다. 

 

이는 개념을 정의하는 과정에서 본질적인 속성만을 남기고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추상화 작업으로 이어집니다. 추상화를 통해 얻어진 개념은 철학적 사유의 핵심이며, 소크라테스는 이 작업을 통해 사람들이 합의 가능한 명확한 개념을 형성하려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도 자신만의 개념 세계를 구축해왔지만, 그들은 주로 은둔하거나 교주처럼 혼자서 철학적 개념을 운용했습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을 통해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개념들을 명료하게 만들고, 합의 가능한 상태로 끌어올리려 했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에우티프론'에서 소크라테스는 '경건'이라는 개념을 두고 에우티프론과 논박을 벌이며, 개념에 붙어 있는 모순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벌이며, 사람들이 자신이 훌륭하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캐묻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며, 덕에 대한 깊은 이해가 훌륭한 삶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방법: 진리에 가까워지는 논증술


소크라테스는 "경건"의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 에우티프론과의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에우티프론은 자신의 아버지를 고발하면서, 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경건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불경죄로 고발당한 상황이었기에, 재판에서 유리하게 변론하기 위해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에우티프론은 경건이란 사람을 죽이거나 성물을 훔치는 것과 같은 죄를 기소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정의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예시로 드는 행동이 경건하다는 것만으로는, 다른 행동이 경건한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경건함의 본질, 즉 모든 경건한 행동을 경건하게 만드는 공통된 형상이 무엇인지 정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에우티프론은 경건이란 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이고, 불경은 신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소크라테스가 원하는 정의에 가까웠지만, 그는 여기서 논박술을 통해 에우티프론의 정의에 포함된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신들 사이에도 다툼과 불화가 있지 않느냐고 물었고, 에우티프론은 이를 인정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신들 간에 무엇을 사랑하고 미워하는지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동일한 행동이 어떤 신들에게는 사랑받고 다른 신들에게는 미움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에우티프론의 정의에 따르면, 하나의 행동이 동시에 경건하면서 불경한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논리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술은 무지에서 시작해 상대방이 내린 정의의 모순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점진적으로 진리에 가까워지는 방법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소크라테스가 상대방이 이미 갖고 있는 신념과 지식을 바탕으로 논증을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대화 상대가 내린 정의가 그들의 생각과 모순된다는 것을 드러내어, 스스로의 무지를 인식하게 하고 내면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지혜를 끌어내도록 돕습니다. 이 과정이 바로 '산파술'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산파였던 것처럼, 자신은 지혜를 직접 낳을 수는 없지만, 대화 상대가 새로운 지혜를 탄생시키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경건, 절제, 용기, 정의 등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깨고, 점차 모순이 적은 개념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더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소크라테스는 믿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자였지만, 동시에 내면의 양심 소리인 '다이몬'을 믿는 초월적 신념도 갖고 있었습니다. 다이몬은 '신령'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이후 '데몬'이라는 단어로 발전해 기독교에서 악마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을 통해 영혼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고 믿었으며,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원론자였습니다. 그는 육체는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며, 영혼만이 불멸하고 인간의 본질이라고 보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육체의 쾌락이나 안녕에 집착하기보다는, 인간의 본체이자 주인인 영혼을 탁월하도록 돌보는 것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라고 여겼습니다.

소크라테스, 육체가 영혼의 탐색을 방해한다고 생각. 


소크라테스는 육체가 영혼의 진리 탐색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육체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고, 이를 위해 논박술과 산파술을 이용한 문답법을 제시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을 통해 인간이 이성적 사유를 하게 되고, 이를 통해 자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변화는 영혼을 돌보는 것이며, 소크라테스는 육체의 안녕이나 쾌락에 집착하지 않고 영혼을 탁월하게 돌보는 것이 참된 삶이라고 여겼습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잘 돌본 영혼의 힘으로 육체를 완벽히 제어하려고 했습니다. 맨발로 눈길을 걷거나 술에 취하지 않는 그의 행동은 이러한 생각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는 소박하고 자족하는 삶을 살았으며, 미남 알키비아데스의 성적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가 죽음의 순간에서도 초연한 태도를 보인 것은 그가 영혼을 잘 돌보았다는 증거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영혼을 돌보고자 했습니다. 그는 낮에는 아고라에서, 저녁에는 성문 밖에서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과 만나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대화 상대방이 스스로의 앎을 설명하지 못하게 하거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궁지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러한 해결 불가능한 상황을 '아포리아'라고 하며,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는 사람들이 자신의 내적 모순과 마주하고,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갖게 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사람들이 수용하기 어려워 했음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인들에게 제시한 사명은 자기 스스로 삶을 검토하는 것이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끄러워하거나 화를 낼 정도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질문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도 미해결인 개념인 정의, 용기, 절제,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무지하다고 말했으나 너무 과장된 부분이었고,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사고가 해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아포리아에 이르렀을 때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반지성주의가 횡행하는 시절에도 철학적인 사고를 펼치며 더 나은 영혼을 만드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 신불경과 청년성매매 혐의로 인한 2차 재판


소크라테스는 세 명의 시민, 비극 작가 멜레토스, 별론 학자 리콘, 민주파 정치가 아니토스에 의해 고발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소크라테스의 논박술로 인해 피해를 입었거나 다른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제기된 주요 혐의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믿지 않고 외부의 신을 들여왔다는 불경죄였고, 두 번째는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혐의였습니다.

첫 번째 혐의인 불경죄는 소크라테스가 그리스인이 믿는 올림포스 신들을 믿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평소 호메로스 서사시에서 표현되는 불완전한 신들과는 달리, 신은 완전히 선한 존재라고 주장하며, 인간이 기도하거나 희생 제물을 바친다고 해서 신이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신격 다이몬을 외부에서 들여왔고, 지하나 천상의 일을 탐구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고발인들은 소크라테스가 무신론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아테네의 법과 규범은 모두 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이 혐의가 인정된다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헌법을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아낙사고라스는 태양이 신이 아니라 단순한 불덩어리라고 주장하다가 사형을 선고받고 도망쳤으며, 프로타고라스는 신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추방된 바 있었습니다. 아낙사고라스는 당시 최고 권력자 페리클레스의 친구였음에도 불경죄 앞에서는 그의 사회적 영향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혐의인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주장도 여러 맥락이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추첨제로 공직자를 뽑는 아테네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비전문가들이 제비뽑기로 선출되어 아테네를 통치하는 것을 비판했고, 이를 따르는 제자들 또한 민주주의를 비판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매국노와 압제자가 나왔기 때문에, 고발자들에게는 소크라테스를 반체제 인사로 몰아가는 좋은 구실이 되었습니다. 당시 아테네인들은 공직 추첨에서 사용한 제비뽑기 기계인 클레로테리온이 신들의 인도를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비판은 자연스럽게 불경죄와 연결되었습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논박술을 가르치며 부모의 무지를 지적하게 하고, 지혜 있는 자를 아버지보다 더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당시 아테네 사회에서 절대적인 가부장적 권위를 무시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혐의는 사실, 소크라테스가 40대였을 때 그리스 최고의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에서 비롯된 편견이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한 아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별론술을 배워 채권자들과의 소송에서 승리하지만, 그 후 아버지와의 다툼에서도 별론술을 사용해 아버지를 공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에서 아버지가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라고 부른 부분이 중요한데, 당시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를 궤변론자이자 소피스트로 여겼습니다.

소피스트들은 처음 등장했을 때 아테네 시민들에게 수사학과 변론술을 가르쳐 공론장을 활성화하고 논리적 심판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계몽적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활동은 아테네 사회에 분열과 물질 만능주의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아테네의 몰락 이후, 소피스트들은 그 몰락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고, 유명 소피스트들이 사라지면서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의 상징이 되어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다양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불경죄와 청년들을 타락시킨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세계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재판 중 하나로,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1차 재판에서는 고발인들이 고발 이유를 밝히고, 소크라테스는 자기 변론으로 이를 방어했습니다. 이후 501명의 배심원들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판결하였으며, 유죄가 결정되면 2차 재판에서 형량이 정해졌습니다.


소크라테스, 1차 재판에서 유죄 판결 받아

1차 재판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고발자들이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비난한 것과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주장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론했습니다.

 무신론자 혐의에 대한 변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태양을 돌이나 흙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으며, 자신은 완전한 유신론자임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내면에서 들리는 '다이몬'의 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고발자들이 새로운 신을 들여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했죠. 다이몬 자체가 신이거나 신의 자식 같은 하위 정령이며,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듣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두고 새로운 신을 들여왔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했습니다.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혐의에 대한 변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적이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타락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강조했습니다. 또, 혹여 자신을 따르는 젊은이들이 타락했더라도, 그것은 개인적으로 그들을 고쳐야 할 문제이지, 고발자 멜레토스가 자신을 고발할 이유는 아니라고 비판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소피스트가 아니며, 단지 대화를 통해 진리를 탐구했을 뿐이고, 돈을 받고 가르친 적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고발의 진짜 이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고발당한 진짜 이유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바로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문답법을 통해 그들의 무지를 드러냈기 때문에, 그들이 화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탁에 따르는 길이기에 배심원보다 신에게 복종해야 하며, 문답법을 멈출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배심원들에게 동정을 구하지 않고 법과 진실에 따라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변론에도 불구하고, 유무죄를 가리는 투표에서 소크라테스는 유죄 281표, 무죄 220표로 최종 유죄 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표차가 근소했기 때문에, 아직 사형 판결의 가능성은 높지 않았습니다.

 

10.  소크라테스의 사형 판결에서의 변론과 배심원의 결정

2차 재판의 절차

2차 재판에서는 원고와 피고가 각각 형량을 제시하고, 배심원들이 두 제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피고가 형량을 지나치게 낮게 제시하면 배심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선을 찾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형량 제안  

고발인들이 먼저 사형을 제안한 후, 소크라테스에게 변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대중은 소크라테스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굴욕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라 기대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대중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변론을 펼쳤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테네 시민들의 영혼을 고양시킨 공로자이므로, 죽을 때까지 급료를 받고 영빈관에서 식사를 제공받는 형량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자 친구들이 벌금형을 제안하라고 강권하자, 마지못해 30문화의 벌금형을 제안했습니다.

배심원들의 반응과 결과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배심원들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고, 결과적으로 표차는 더욱 벌어졌습니다. 360대 140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고발인들이 제안한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심지어 처음에 무죄를 선택했던 배심원들조차도 소크라테스의 태도에 실망해 사형에 표를 던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형 선고 이후 소크라테스의 변론


소크라테스의 사형이 결정된 후, 3차 변론이 이어졌습니다. 보통 변론은 2차에서 끝나지만, 플라톤이 허구를 추가했거나 소크라테스의 명성을 고려해 특별히 허용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지지한 사람들과 무죄나 벌금형을 지지한 사람들에게 각각 연설했습니다.

사형을 지지한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사형에 찬성한 배심원들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내 사형이 집행된 후, 여러분에게 훨씬 더 무거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누군가를 죽여서 올바르지 않은 삶을 꾸짖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착각입니다.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남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훌륭하게 다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죽음을 피하는 것보다 악덕을 피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저는 늙어서 느린 죽음에 붙잡혔지만, 젊고 방자한 멜레토스는 더 큰 악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무죄나 벌금형을 지지한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무죄나 벌금형에 투표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테네 법정에서 한 모든 변론은 영적인 것에 의해 인도된 것입니다. 선한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이나 죽은 후에도 아무런 해악이 없습니다. 죽음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첫째, 죽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 감각도 없습니다. 아무 감각 없이 그저 잠만 잔다면, 이보다 더 큰 이익은 없겠죠. 살아서 그런 평온한 잠을 경험하기는 힘들 테니까요."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마지막까지 지켰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사형 집행과 그 결말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사형 집행은 델로스 섬에 보낸 제사가 돌아올 때까지 연기되었고, 이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한 달 이상 살아 있을 수 있었으며, 사형 집행이 금지된 축제 기간에는 더 오래 살 수 있었습니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받아들이지 말고 타옥에서 탈출하라고 권유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법 체계를 인정하며 사형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후대에서 다양한 해석이 생겼는데, 법적 안정성을 중시한 공동체 주의자들의 관점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선택이 옳았지만 일부는 이를 시민 불복종의 한 형태로 보기도 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와 아스클레피오스, 철학사를 바꾼 이야기

 

운명의 날이 밝아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간수가 가져온 독배를 마셨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론'*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신 후, 누운 상태로 몸이 굳어지고 경련을 일으키며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배를 마시기 전, 소크라테스는 문득 생각난 듯 크리톤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남깁니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잊지 말고 내 이름으로 꼭 갚아주게."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으로, 당시 아테네에서는 병에서 회복하면 그에게 감사의 표시로 재물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말에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음으로써 삶이라는 질병에서 해방되었으니, 이 궁극적 치료를 해 준 아스클레피오스에게 감사의 의미로 닭을 바치라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병으로 고생하다가 나았는데, 아직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재물을 바치지 못해 그걸 갚아달라는 말 그대로의 의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향년 70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초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비극이 아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또한 "오늘날 소크라테스 없이는 철학을 할 수 없으며, 소크라테스를 어떻게 체험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사유가 결정된다"고 말했죠.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의 철학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이 자연의 근원을 찾으려 했던 시도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으로 전환시켰고, 소피스트들이 해체해 놓은 윤리를 다시 세우며, 삶의 근본 문제들을 이성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삶을 위한 개념들을 하나씩 정립해 나갔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인생을 집대성하는 문장은 바로 "그대의 영혼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이 한마디는 서양 철학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제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그가 남긴 영혼이라는 개념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 결과, 플라톤은 어렵지만 독창적인 철학 체계를 세우게 되었고, 이후 서양 철학은 플라톤이 만든 체계 안에서 모든 논의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이죠.